강영호 선생을 아십니까? 진주 출신 소년운동가로 방정환 선생과 함께 어린이날 제정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인데요.
어린이날을 맞아 그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. 조진욱 기잡니다.
진주교육지원청 앞
한 남성의 흉상.
중절모를 눌러쓴 그는
진주 출신 소년운동가
우촌 강영호 선생입니다.
1896년.
진주 부호이자
봉래초등학교 설립자
강재순 선생의
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.
형평운동을 이끈
강상호 선생의
친동생이기도 한 그는
평소 타인에게 베푸는 삶을
살았다고 전해집니다.
▶ 인터뷰 : 김** / 강영호 선생 며느리
- "아버님이 베푸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아침에 골목에 나올 때 굴뚝에 불 안뗀 집이 있으면 쌀독을 열어서 바닥에 소리가 나도록 쌀을 퍼서 그 집 대문 안에 놔두고 오라고 하고... "
아버지의 영향인지
아이들에게 관심 많던 강 선생은
1920년 진주소년회를 창립.
당시 개념조차 생소하던
소년들의 인권 창출에 힘써왔습니다.
▶ 인터뷰 : 추** / 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
- "어린이를 대우해야 제대로 된 인권운동이 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소년운동을 진주에서 먼저 시작했어요. 1920년대에..."
소년운동은
유학 중에도 이어졌습니다.
어린이날 제정을 이끈
색동회 1차 회의록입니다.
소파 방정환 선생과 더불어
강영호 선생의 이름이
기록 돼 있습니다.
1923년.
강영호 선생을 비롯한
동경 출신 유학생들은
아동문학동인회와 색동회를 창립해
어린이날 행사를
처음 시작했습니다.
▶ 인터뷰 : 추** / 진주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
- "동경유학을 가서 방정환 선생을 만나서 '어린이를 대우하는 시대가 돼야 한다' 하니 방정환 선생이 '좋아 그건 좋은 일이지 그래서 색동회를 만들어서 동경유학을 끝내고 국내에 와서 전국적으로 어린이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죠."
강 선생은
항일운동에도 힘썼습니다.
1920년대 신간회와
진주청년친목회 임원으로
항일전단 수천장을 배포하려다
일본 경찰에 발각되기도 했고,
1930년대엔
반제단 지방단부를 조직하는 등
항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.
▶ 인터뷰 : 김** / 강영호 선생 며느리
- "얼마나 그 세월 속에 일본사람들한테 쫓겨 다니고 오죽하면 전라도 광주의 어느 광산까지 가서 숨어 계셨다는데 뭐..."
이후 광복을 맞이했지만
강 선생의 기쁨은 오래가지
못 했습니다.
1950년 6월.
보도연맹 사건과 연루돼
운명을 달리했습니다.
▶ 인터뷰 : 김** / 강영호 선생 며느리
- "처음에 흉상을 세우고 이 비석 뒤에 앉아서 내가 너무 울고 갔습니다. 왜 울었냐면 아버님을 생각해서... 이렇게 한이 많은 분을..."
일제의 탄압 속에서도
소년 계몽운동을 펼쳤던
우촌 강영호 선생.
그동안 가려져 있던
선생의 업적을
재평가 해달라는 움직임이
소년 운동 발상지인
진주에서
하나, 둘 피어나고 있습니다.
SCS 조진욱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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